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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声人語

2017년 10월 18일 천성인어(天声人語), 日本語を作った男

by 곰돌이풉 2017.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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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아사히신문 사설인 천성인어(天声人語) 2017년 10월 18일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의역이 있습니다.

日本語を作った男일본어를 만든 사람.

明治の初め、「東京」の呼称やかな書きはバラバラだった。「とうきやう」「とうけい」。
메이지 초기, '도쿄'라는 호칭과 카나가키(일본어를 적는 방법)은 제각각이었다.'도캬우', '도케이' 등등.

「とーきょー」がよいと説いたのは言語学者の上田万年(かずとし)だ。
'도-쿄-'라 좋다고 말한 것은 언어학자인 우에다 카즈토시 씨였다.

近代日本語の確立に尽くした人だが、戦後の評価は高くない▼「植民地に日本語を押しつけたとか、方言を衰退させたとか、功罪の罪ばかりを批判されました」と大東文化大准教授の山口謠司さん(54)は話す。
근대일본어 확립에 열을 쏟은 사람이지만, 전후 평가는 좋지 않다. '식민지에 일본어를 가르치도록 밀어붙였던 점, 방언을 쇠퇴시킨 점 등, 나쁜 점만 비판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대동문화대 준교수 요지 야마구치 씨는 이야기한다.

師の師の師にあたる万年の歩みを丹念に調べ、『日本語を作った男 上田万年とその時代』を著した▼万年の学生時代、日本語の運命は揺れに揺れた。
스승의 스승의 스승에 해당하는 카즈토시 씨의 발자취를 열심히 조사해, "일본어를 만든 남자, 우에다 카즈토시와 그 시대"를 집필했다. 카즈토시의 학생 시절, 일본어의 운명은 흔들리고 또 흔들리고 있었다.

「漢字を全廃してローマ字式で」「かな50字のみで書く国に」。
"한자를 없애고 로마자를 쓰자", "가나 50자만을 사용하는 국가로".

学者や政治家が真顔で論じた▼万年が情熱を注いだのは言文一致である。
학자, 정치가들이 진지하게 논하던 시기. 카즈토시가 열정을 쏟은 것은 언문일치였다.

「書き言葉を話し言葉に近づけたい。しかも日本中で同じ書き方を」と考えた。新しいかな遣いは学校で採用される。
"문어를 구어에 가깝게 하고 싶다. 게다가 일본 전역에서 같은 문어를 사용하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가나 사용법은 학교에서 채택된 때였다.

ところが復古派が森鴎外を旗頭に立て、元に戻してしまう▼「重要な会議で鴎外に敗れたのが1908(明治41)年。
하지만 복고파가 모리 오가이 등을 선두로 세워, 예전으로 돌려버리고 만다. "중요한 회의에서 모리 오가이 파에 패배한 것이 1908년(메이지 41년)의 일이다."

万年は政府の役職を降ります。抗議の辞任でした」と山口さん。
카즈토시는 정부의 정부의 봉급을 받다가 자리를 떠납니다. 항의의 뜻의 사임이었어요."라고 야마구치 씨는 말한다.

万年の夢に近いかな遣いの現代化が実現したのは、その死後の46(昭和21)年である▼鴎外の文語体の作品はなるほど格調が高い。
카즈토시의 꿈에 가까운 가나 사용을 현대화한 것은, 그의 사후 46년(쇼와21년)이었다. 모리 오가이 파의 문어체의 작품은 역시 격조가 높다.

だが現代人には骨が折れる。他方、夏目漱石を始めとする言文一致の作品は格段に読みやすい。
하지만 현대인에게는 매우 힘들다. 한편, 나쓰메 소세키를 비롯한 언문일치 작품은 읽기 쉽다.

いま私たちの親しむ日本語の礎石となったのは万年の理想だったのかもしれない。
지금 우리들이 즐기는 일본어의 초석이 된 것은 카즈토시의 이상이었을지도 모른다.

生誕から150年、「日本語を作った男」という呼称は少しも大げさではない。
그의 탄생 150년. '일본어를 만든 사람'이란 호칭은 조금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by 곰돌이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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